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외인부대 (문단 편집)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외인부대 역사상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전쟁이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모두 10,483명이 전사했는데 외인부대 역사상 1만 단위를 넘기는 전사자는 오로지 베트남 전쟁 뿐이었다고 한다. 전사자 중 [[한국]] 출신이 3명이 있다고 한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는 [[베트민]] 측이 [[대포]]와 [[대공포]]를 분해해서 산 정상까지 끌고온 뒤 조립해 포격하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웠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엄청난 희생 끝에 결국 항복하였다. 또한 이 전쟁 자체가 베트남의 독립 전쟁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증오를 사고 있던 탓에 험악한 대우를 받아 포로 상당수가 죽어나갔다. 게다가 디엔비엔푸에서 붙잡힌 프랑스인들은 민간인도 아니고 포위된 상황에서 사력을 다해 싸운 정예 군인들이라 승리했지만 피해가 컸던 베트남 측으로써는 이들에 대한 감정이 더욱 악화될 수 밖에 없다. 프랑스군에 대해 감정이 좋을 리가 없는 베트남인들은 포로들을 수백km 이상 떨어져있는 포로 수용소까지 도보로 이동시키면서 식량으로는 [[미숫가루]] 한줌만 지급하고 이동 중 낙오하는 포로들은 [[개머리판]] 등으로 폭행하여 강제로 일으키고 거부하거나 일어나지 못하는 포로는 현장에서 사살했다. 프랑스 당국은 포로 학대라고 분노했으나 식민지 시절에 베트남인들을 가혹하게 다루며 [[단두대]]까지 동원하여 처형했던 탓에[* 특히 독립전쟁시기에는 프랑스군이 [[하이퐁]] 등지에서 [[학살]]을 저지른 바 있었다.] 베트남인들의 프랑스 포로 취급은 달라지지 않았다. 생포된 외인부대원 가운데, 베트남과 같은 공산국가 겸 우방국이었던 [[동독]] 지역을 비롯한 당시 공산국가 지역들의 출신자에 한정하여 고향에 가는 걸 조건으로 우방국 예우 차원에서 조기 석방시켜주기도 했다. 그래서 동독 출신 및 공산권 출신의 외인부대원 중 몇명이 조기석방되는 경우도 있었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프랑스군 활주로까지 포위되어 항공 탈출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패배가 뻔히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결사항전을 각오한 것을 보면 엄청난 군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